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시와라 간지 (문단 편집) == 생애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anji001.jpg]]|| || 어린 이시와라 간지 || [[야마가타현]] 니시타가와군 츠루오카정[* 현 츠루오카시]의 하급무사 집안 출신으로 아버지는 경찰관이었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일본 [[도호쿠]] 지역은 당시 일본에서도 아직 발전이 안 된 가난한 지역으로 옛날에는 머리도 좋고 성적이 우수하지만 집안이 가난한 인재는 학비가 면제되고 국가가 먹여주고 재워주는 군사 학교로 진학하는 경우가 많았다. 1902년, 센다이 육군중앙지방유년학교에 입학, 1905년, 육군중앙유년학교를 입학, 1907년 [[일본육군사관학교]]에 21기로 진학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1910년 4월부터 1912년까지 [[조선군(일본제국)|조선군(조선주둔 일본군)]]에서 2년간 군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때 1911년 [[신해혁명]] 소식을 듣고는 '''병사들을 이끌고 가까운 산에 올라가 '만세'를 외치며 중국의 앞날을 축복'''하는 등 [[중화민국]]에 대해 상당히 큰 기대를 품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 [[쑨원]]과 [[위안스카이]]의 타협이 이루어져 위안스카이가 대총통에 오르더니 졸지에 [[중화제국]]이 탄생하는가 하면, 위안스카이 사후에는 중국이 군벌 간의 내전으로 치닫게 되자 중국인들의 정치적 능력에 의심을 품게 되었다고 회고하였다. 이후 육군의 엘리트들이 그러듯이 1915년에 당시 일본 육군 장교의 최고 엘리트 코스인 [[육군대학교]]에 입학하여 재학기간 동안 일필휘지로 군사적인 각종 건의를 하였고[* 당시 육군대학교는 매주 군사 레포트 제출을 요구하였는데 이시와라는 레포트 제출 기한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 앉은 자리에서 레포트를 줄줄이 써서 낸 다음에 제출했는데 그 내용이 언제나 훌륭했다고 한다.] 최종적으로 차석으로 졸업했다. 차석으로 졸업한 이유가 재미있다. 수석 졸업자는 천황과 만나는 기회가 주어지는데, 이시와라가 평소 거침없는 발언을 하는 탓에 사고를 칠까 두려워 일부러 차석을 주었다고 한다. 이 거침없는 발언에 대한 이야기는 조선 생활 때에도 일화가 있다. 당시 일본 최고의 나니와부시(浪花節)[* 로쿄쿠(浪曲)라고도 한다. 한국의 [[판소리]]와 형식이 약간 비슷한 1인 창극이다.] 연기자인 도츄켄 구모에몬(桃中軒雲右衛門)이 조선 각지에서 공연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시와라 간지의 부대에도 방문하게 되자, 연대장이 기차역으로 구모에몬을 마중 나가라고 명했다. 그러자 이시와라는 "구모에몬은 그쪽(나니와부시) 계열에선 최고의 인물인데, 일개 소위인 제가 가기엔 예법상 실례일 것 같습니다. 연대장님이 직접 마중을 나가심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라고 반론했다. 그러자 연대장은 의외로 순순히 이를 수락했다고. 또한 육군대학 시절 '기관총의 효과적인 운용 요령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제출하자 "기관총을 항공기에 장비시켜 술주정꾼이 걸으면서 소변을 보듯 전방위 화망을 형성해 적 행군 종대에 퍼붓는다."라는 대답을 구술했다는 야사도 있다. 육군대학 졸업 후 성적이 우수한 졸업생들에게 제공된 국비장학생 신분으로 독일에서 유학을 했다. 당시 유럽에서 퍼져있던 [[황화론|황인종 멸시 사상]][* 그 뿌리는 몽골의 유럽 침략부터 시작된 아시아인들이 불행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미신과 황인종을 미개인으로 깔보는 백인 우월주의 사상. 나치 독일의 반유대주의도 유대인을 황인종 취급을 했다.]을 접하고, 아시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깨닫는다. 그래서 파티 등에 참석할 때는 일본 전통 복장을 입고, 포크와 나이프를 안 쓰고 직접 지참한 젓가락을 꺼내서 먹었다고 한다. 그리고 황화론의 반발로 일본과 중국이 힘을 합쳐 서양 열강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유학을 가기 직전인 [[1920년]]에 '''일련종 계열의 신흥종교인 국주회(国柱会)[* 특히 [[천황]]을 높이 떠받드는 종파였다. 쉽게 설명하면 기독교에서 종말의 최후의 심판에 등장하는 메시아가 예수 그리스도라면, 이 종교에서는 그 메시아역은 부처이자 현인신 천황. 대표적 슬로건이 팔굉일우(八紘一宇). 유명한 신자로는 [[미야자와 겐지]]가 있다.]의 열렬한 신도가 된다.'''[* 일련종 계열은 한국에서는 [[창가학회]]가 유명하지만, 국주회는 전전에는 창가학회보다 주류였던 종파로, 창가학회와는 다른 성향의 종교다.] 이 국주회의 교리가 <세계최종전론>의 모티브가 된다. 독일 유학 중이었던 1923년 일본에서 일어난 [[관동 대지진]]은 니치렌 대사가 설법한 세상이 종말로 치달리는 변환기에 들어선 증거라고 믿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베르사유 조약]] 조인이라는 굵직한 사건들을 겪은 직후, 일본 군부는 앞으로 전쟁이 물량전·소모전·보급전·과학전이란 교훈을 깨달았다. '''다만 그렇게 가면 절대 승리할 수 없다는 논리적 결과가 나와서 그 반동으로 [[정신력]] 제일주의로 후퇴해버린 것이다.'''[* 일본이 서구유럽의 제1차 세계대전식 물량전을 감당할 만큼 경제발전을 할 시간에 그들이 지금 수준에서 [[붉은 여왕 효과|정체하지는 않을]] 테니까. [[제1차 세계대전]] 말기에 일본도 중국에서 국지적으로는 물량전을 해봤지만 이걸 전구단위로 확장하면 답이 없다는 결론을 진즉에 냈고, 이후 군축 분위기에서 어떻게든 조직을 유지하려다 보니 사람으로 그것도 현역을 완편하지 않는 부대가 늘면서 기계화와 화력강화는 물건너가게 된다. 그 상태로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은 어떻게 감당했지만 기어코 할힌골 전투까지 갔고, 소련군 무서운 줄은 알아도 미군 무서운 줄은 모르고 북방이 막혔으니 대신 남방으로 틀었다가...] 그래서 황도파 파벌은 일본이 장기전을 하면 [[러시아]]처럼 왕정이 망할 것이라며 천황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우린 안될거야 아마|우린 전면전은 안 될 거야]] 그러니 제한적인 상황에서만 이길 수 있게 알아서 기자.'는 결론을 내렸다.[* 다만, 그렇다고 군인이 대놓고 '우린 영미 못 이김'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에 보병교전에는 "언제라도 공격, 공격", "기습을 하면", "정신력 제일"이면 이긴다고 써놓긴 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약소국을 상대할 때 내지는 제한전 시의 기준'''이고, '''강대국과는 아예 전쟁을 하면 안 된다'''는 '''암묵적 불문율'''을 전제했다. 그러나 [[2.26 사건]]으로 황도파는 나가리되었고 이 교리의 내막을 모르는 통제파가 강대국 대상으로도 무조건 돌격을 해 버린 끝에..] 그러나 간지가 속한 통제파는 "우리도 경제 발전으로 선진국을 따라 잡을 수 있다! 다만 자유방임 경제 말고 '''계획 경제 통제로.'''"라는 주장을 했다. 그래서 통제파 장교들인 간지나 나가타 데츠잔, 스즈키 데이치나 이케다 스미히사는 "[[빨갱이]]"란 비난을 받기도 했다. [[2.26 사건]] 당시에는 궐기군에 의해 살해 대상으로 지목되었으나 실제로 습격을 받지는 않았다. 이시와라는 2.26 사건에 대한 토벌명령 하달을 강력하게 상주하였고, [[쇼와 덴노]]는 훗날 이에 대해 "'''이시와라라는 인간은 어떤 인간인지 잘 모르겠다.''' 만주사변의 장본인이긴 하지만 이때의 태도는 정당했다."라고 회고했다. 사실 통제파라곤 해도, 정작 '자원 부족의 국가 일본'란 본질적인 문제에 대안을 내놓지는 못했다. 그러나 만주를 차지하고 그곳을 거점으로 해서 공업화를 추진해서 '''궁핍한 나라 일본을 풍부한 나라로''' 바꾸려는 급진파가 이시와라 간지였다. 그의 사상은 통제파의 주장과 엇물리는 점이 있지만, 본인의 인맥은 어느 파벌에도 속하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